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독립 전쟁 (문단 편집) === 지지부진한 전황 === 이렇듯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열강들이 영국에게 엿먹이는 목적도 있었으나 미국 독립을 지지하며 전쟁에 개입하며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영국 정부]]는 필라델피아를 장악한 영국군에게 뉴욕으로 철수하고 그곳을 요새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덕에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으로부터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이수받고 1778년 6월 [[몬머스 전투]]에서 뉴욕의 영국군을 상대로 선전했고, 새러토가 전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윌리엄 하우 소장의 뒤를 이어 뉴욕의 영국군 총사령관이 된 헨리 클린턴 소장은 더이상 대륙군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뉴욕에 틀어박혔다. 이로써 전쟁의 양상은 미국에게 좀 더 유리해졌지만 좀처럼 끝이 나지 못한다. 이유는 양측 모두 내분이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측은 전쟁의 장기화로 점차 돈이 부족해지면서 군인들에게 줄 월급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탈영병들이 속출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돈에 쪼들린 대륙군을 위해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는 군수물자의 가격 통제를 실시하지만 이는 '''[[밸리 포지의 교훈]]'''을 일으키게 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반란]]을 일으키려 하기도 했다.[* 미국은 이러한 막장상황을 타개하고자 타국에 인원을 파견하여 '''복권을 잔뜩 사오게 했다.''' 이때 사온 [[복권]]들은 미 화폐 기념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그 수가 수백장에 이른다.] [[베네딕트 아놀드]] 같은 경우는 아예 미국을 배신하게 되며 훗날 그는 미국 최악의 [[매국노]]로 낙인찍히게 된다. 거기다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점차 반전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본국 영국 또한 전쟁의 장기화와 미국과 영국 본토와의 기나긴 거리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수송비용을 더불어 전쟁을 통해 늘어가는 빚과 아직도 항복을 하지 않는 미국의 근성, 군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점차 미국을 아예 독립시키자는 의견이 늘게 된다. 그럼에도 [[조지 3세]]와 영국 정부는 황금알을 낳는 오리인 미국을 포기하지 않고 대병력을 보내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새러토가 전투의 결과는 한편으로는 미국에게 더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다. 영국이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정하면서 또한 전쟁의 목적을 '반란을 진압하는 것'에서 '독립을 저지(미국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하는 것, 그리고 만약 어쩔 수 없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면 거기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내는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조지 3세는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약속된 전쟁을 무한히 연장하여 그들의 불복종을 처벌할 것"이라며 뉴욕, 로드아일랜드, [[퀘벡]], 그리고 플로리다에 있는 요새에 3만 병력을 주둔시키고 식민지들의 항구를 파괴하고 해안을 따라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해 그들에게 반역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영국의 목적이 전자에 머물러 있을 때는, 조지 워싱턴이 그렇게 했듯이, 대륙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넓은 북미 [[아메리카 대륙]] 여기저기로 도망다니다가 영국군이 방심했을 때 기습하거나 혹은 유리한 조건에서만 싸우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영국의 목적이 후자로 바뀌자, 대륙군은 영국군과 정면 대결을 벌여 축출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길이 요원해졌다. 급기야 1778년 말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에 파견된 영국군이 [[서배너 공방전]], [[찰스턴 공방전]], [[캠던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자, 독립 세력은 이대로 전쟁이 끝나게 되면 신생 독립국 미국이 13개 주에서 세력이 더 줄어들게 될 뿐 아니라 북쪽(캐나다)과 남쪽(이번에 영국군이 점령한 조지아,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일부) 양쪽으로 강력한 영국의 식민지와 맞닿게 될 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졌다. 하지만 독립세력에겐 다행히, 워싱턴이 남부로 급파한 너대니얼 그린 소장이 군대를 잘 수습한 후 영국군을 상대로 선전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는 영국군의 추격을 절묘하게 뿌리치면서 전력을 유지하면서 별동대를 꾸준히 파견해 영국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영국군은 그런 그를 상대로 15차례의 전투를 치렀지만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1781년 3월 15일에 벌어진 [[길퍼드 코트하우스 전투]]는 이러한 그린의 탁월한 전술적 감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린은 영국군을 상대로 대단히 분전해 상대에게 큰 타격을 입힌 후 영국군이 전력을 다해 공세를 가해서 전황이 점차 불리해지자 전혀 망설이지 않고 철수했다. 전투 자체는 영국이 이겼지만, 피해는 영국 측이 훨씬 더 많이 입었다. 또한 남부의 영국 충성파 민병대는 1780년 10월 [[킹스 마운틴 전투]]에서 독립 지지파 민병대에게 괴멸되었고, 그린과 함께 영국군을 상대로 분전한 대니얼 모건 장군은 1781년 1월 17일 [[카우펜스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영국군은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를 석권하려던 뜻을 접고 요새화된 교두보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요새에 틀어박힌 영국군을 몰아내지 않는 이상 전쟁이 지속될 것은 자명했고, 자칫하면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반 자체를 상실하면서 영국의 위협에 맞서 계속해서 프랑스에게 의존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서 데꿀멍한 영국으로부터 13개 주 온전한 독립과 여러 기타 권리를 공식적으로 승인받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뉴욕을 점령하고 있는 영국군 주력 병력은 쉽사리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고, 남부 파견 영국군을 각개격파하자니 남부 여러 지역으로 재빠르게 대병력을 수송할 수 있도록 제해권이 받쳐줘야 하는데, 상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상대로도 전 지구적인 제해권을 잃지 않고 있는 영국이었다. 북미 대륙에 파견된 프랑스 함대는 아직 변변한 전공 하나 올리지 못하고 있었고,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영국 본토 침공과 지브롤터 포위를 시도했으나 그것 역시 영국 함대에게 막혔다. 그 외에 인도나 [[아프리카]] 등 영국 식민지에 대한 공격이나 반영 세력에 대한 지원 등을 통해 견제를 시도했지만 이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러 사건과 우연이 겹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